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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피난 유허비 제막 2008.09.06

보련산 2008. 9. 12. 20:06

1882년 임오군란때 명성황후 피난 유허비 제막 2008.09.06

충북 충주시 노은면 가신3구 신흥마을

 

 

 

                     주춧돌  몇개 남음   

         (국력의 쇠퇴함의 결과 명성황후가 노은 산골까지 피난해야 하는 안타까움 과

           환궁후    일본에 의해 시해까지 당해야는 서러운 역사를 반복하지말아야.....   )

           국망산 올라 내려다보면  여주,이천,안성 방면으로 넓은 들판이, 원주,충주방면은 산악.. 

          명성황후가 피난 넘어온 길로 추정되는 국망산(770M)아래 둔터고개( 앙성면-노은면 경계)

                                             중부내륙고속도로 중원터널 위                      

나의고향  충주시 노은면 국망산

노은면 가신리에 있는 이 산은 770m의 거산인 동시에 험준하기로도 유명하다.
산정에서 바라보면 동남으로는 충주가 서북으로는 장호원을 거쳐
서울까지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는 곳이다.

이 산의 이름이 옛날엔 금방산이었던 것이 국망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임오군란때 고종의 황후였던 명성황후가 이 고장으로 피난을 와서 있는 동안
한양 소식이 궁금해서 매일 이 산마루에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면 초조했다는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도 통로를 따라 올라가면 남자들도 두시간이상 걸리는 험산인데
여자의 몸으로 사실 매일 올라갔다면 그 고생과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성황후가 이곳으로 피난을 오게된 것은 임오군란을 처음엔 장호원을 거쳐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을 찾아온 것이었는데
나중에 자취를 감추기 위해서 이름도 없는 초라한 집을 찾게된 것이
현재 가신리 515번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현재 신흥동마을 한 초가집이었다.
집에 들어서면 천정이 얕아서 일어설 수도 없는 집이었다

그때 이 집에는 총각인 이도령이 홀어머니를 모시고
나무장수를 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처지였는데 친절하기 이를데 없었다고 한다.
피난생활을 마치고 환도하게된 명성황후는
관리를 시켜 이도령을 궁중으로 불러 피난중의 신세를 사례한 다음
소원을 물었더니 겸양하므로 더욱 가상하게 여기어서 음성 군수를 시켰다고 한다.

이도령은 군수로 재직중 성실과 근면으로 선정을 베풀게되자
다시 강원도 정선군수등 5개고을의 군수로 그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 후 그 마을에서는「이음성집」으로 부르게 되어
크게 화제에 올랐던 인물이었다

또 이 마을에서는 이 집터를 대궐터라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