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구곡은 문경시 산양면과 산북면, 예천군 용궁면을 걸쳐서 흐르는 금천錦川에 설정된 아홉 굽이이다. 그런데 청대 권상일은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청대구곡을 설정한 것이 아니라 시내를 따라 내려오며 아홉 굽이를 설정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구곡은 주자의 예에 따라 아홉 굽이를 설정하였는데, 청대는 시내 상류에 제1곡을 설정하고 하류에 제9곡을 설정하여 다른 구곡원림과 차별을 두었다.
권상일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시호는 희정僖靖이며, 문경 근암리近嵓里에서 출생하였다. 171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 전적, 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에 올랐다. 1733년 양산군수, 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상소하여 민폐 근절책과 관기 숙정 방안을 건의하였으며, 홍문관의 계청에 의하여 경연에 참석해 소신을 진술하였다. 1745년 봉상시정, 이듬해 사헌부헌납, 사간원사성, 사헌부집의, 동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역임하고, 1748년 우부승지로 물러났다. 뒤에 대사간, 판결사, 홍문관부제학, 한성좌윤, 지중추부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청대구곡淸臺九曲 제1곡은 우암愚巖, 제2곡은 벽정碧亭, 제3곡은 죽림竹林, 제4곡은 가암佳巖, 제5곡은 청대淸臺, 제6곡은 구잔溝棧, 제7곡은 관암觀巖, 제8곡은 벌암筏巖, 제9곡은 소호穌湖 이다.
제1곡 우암愚巖
一曲愚巖擁不開 일곡이라 우암이 안아서 열지 않으니
巖前流水自縈回 바위 앞에 흐르는 물은 절로 돌아가네
我家只在川西畔 내 집은 다만 시내 서쪽 가에 있거늘
童子時遊幾往來 동자와 때때로 노닐며 몇 번을 오가나
☞ 우암곡愚巖曲
청대구곡 제1곡은 우암愚巖이다. 청대구곡은 근암서원에서 출발한다. 청대가 은거했던 서중리書中里 마을에서 금천錦川을 향하여 집 한 채와 정자 하나가 있는데, 이 곳이 제1곡 우암이다. 정자의 이름은 우암정友巖亭인데 청대 권상일이 이 굽이를 경영했을 당시에는 이름을 우암愚巖이라 하였다. 그 후 ‘우암友巖’으로 고치고 정자의 이름도‘우암정友巖亭’이라 하였다.
우암대愚巖臺는 현재 우암정 오른편에 솟아있는 바위인데 바위위에 ‘우암채공장수지소
友巖蔡公藏修之所‘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 굽이는 청대 권상일이 경영했을 당시와는 지형이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금천의 흐름이다. 원래 금천은 이 굽이에서 산을 끼고 흘렀는데 지금은 금천이 산과 떨어져서 흐르고 있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는 금천이 ‘쌀개바위’ 앞으로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쌀개바위는 우암이 있는 산의 끝자리에 비스듬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금천이 멀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쌀개바위 앞으로 논길이 난 상태이다.
청대 이후 이 굽이를 차지한 채덕동은 자가 군상君尙, 호가 우암友巖으로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고 부유하였으면서도 검소하였으며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호를 우암으로 짓고 아울러 우암정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근품재近品齋 채헌蔡瀗(1715~1795)은 이 굽이를 석문구곡 제3곡으로 설정하였다. 채헌은 석문구곡 제3곡인 우암대가 자리한 공간을, 앞의 근품산이 뒤는 군자봉이 자리하고 남북으로 넓은 들이 천리를 펼쳐있다고 노래하였다. 실제로 지금 우암정이 자리한 공간은 앞에 금품산이 있고 금천 너머로 넓은 들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다만 지금 확인 할 수 없는 부분은 모래마당에 자리한 화주華柱와 그 맞은편에 자리했던 화수헌花樹軒이라는 집이다. 이러한 기둥과 집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제2곡 벽정碧亭
二曲山高翠欲浮 이곡이라 산이 높고 푸르름 들려 하는데
故人茅棟倚層丘 고인의 띠집이 층암의 언덕에 기대어 있네
輕檣利집何時動 가벼운 돛대 날카로운 노 어느 떼에 움직일까
西岸巖橫一小舟 서쪽 언덕 바위에 작은 배 가로지르네
☞ 벽정곡碧亭曲
청대구곡 제2곡은 벽정碧亭이다. 제1곡 우암愚巖에서 논길을 따라서 내려오다 현리교를 건너면 현리 마을 앞으로 난 도로와 만난다. 이 도로를 조금 내려오면 금천가에 세워진 경체정景棣亭에 이르는데 이 굽이가 제2곡 벽정碧亭이다. 청대는 벽정이 현촌의 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 말은 현리縣里 남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층암이 작은 봉우리를 둘렀다 하였는데 경체정이 있는 곳이 층층의 바위가 해발 96m의 작은 산이 둘러싼 형상이다. 큰 홍수로 인하여 금천의 물길이 바뀔 정도로 지형이 많이 변했기 때문에 청대가 이 굽이를 경영할 때의 지형을 정확히 그려낼 수 없지만 그 당시의 모습을 경체정 주변에서 찾을 수 있다.
청대 권상일은 곁에 홍서일의 함취정이 있다 하였는데 여러 문집을 살펴보았으나 현재까지 함취정에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물을 건너 주암舟岩이 있다는 언급은 이 굽이가 벽정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뒷받침한다. 경체정에서 바라보면 금천 건너편에 주암이 자리하고 있는데, 금천을 내려가는 배가 잠시 이곳에 정박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제3곡 죽림竹林
三曲巍然會老堂 삼곡이라 높다랗게 자리한 회로당은
藍田遺法日星光 남전의 유법이 해와 별처럼 빛나네
願言永世行無廢 원하노니 영원히 폐해지지 않아서
前有淸川袞袞長 앞에 있는 맑은 시내처럼 길이길이 흐르기를
☞ 죽림곡竹林曲
청대구곡 제3곡은 죽림竹林이다. 제2곡 벽정碧亭 건너편, 주암舟岩 아래에 설치된 서중보書中洑의 주변이다. 이 굽이는 오른쪽에 해발 110m의 야산이 있고 왼쪽에 현리 마을이 있다. 가운데 흐르는 금천은 서중보 아래에서 제법 넓은 모래섬을 형성하고 있는데 갈대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청대는 이 죽림이 수계촌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현지 조사과정에서 이 굽이에서 수계촌이라는 마을을 찾아보았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주암의 뒷산에 도천사가 아닌가 한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이 도천사가 청대가 말하는 죽림사가 아닌가 한다.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죽림사 옛터 위에 세 탑이 있다고 하는 청대의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도천사에는 삼층석탑 3개가 있었다. 그런데 이탑은 1974년 김천직지사로 옮겨져 그 중 2기는 대웅전 앞에 나머지 1기는 비로전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대웅전 앞의 석탑은 보물 제606호로, 비로전 앞의 석탑은 보물 제6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청대구곡은 제3곡은 도천사 옛터가 자리한 굽이로 추정할 수 있다. 도천사 옛터에 이르러 아래를 내려다보면 금천이 흐르는데 이 지점에서 굽이를 이루고 흘러간다. 제2곡과 거리가 멀지 않지만 이 굽이가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에 청대가 한 굽이로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제4곡 가암佳巖
四曲洋洋魚躍淵 사곡이라 양양히 고기가 연못에서 뛰고
東看蒼石矗平田 동쪽으로 보니 창석이 평전에 우뚝 솟았네
乘流鼓枻眞閒事 배를 타고 노를 두드림은 진실로 한가한 일이니
早晩巖前繁小船 아침저녁으로 바위 앞에 작은 배를 매네
☞ 가암곡佳巖曲
청대구곡 제4곡은 가암佳巖이다. 아름다운 바위라는 이 이름은 청대가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금천에서 가암이라는 바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형상이 너무 아름다워 이렇게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제3곡 죽림에서 물길을 따라서 내려오다 보면 굽이지는 부분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가암으로 추정된다.
시내 건너에서 바라보면 바위위에 자라는 나무가 바위를 덮고 있어 얼핏 보면 바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다. 곁에 또 다른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창초대蒼峭臺이다. 푸른빛을 하고 가파르게 솟아 있는 대라는 의미의 창초대는 소나무로 덮여 산인지 바위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에서 금천은 굽이지며 시내 양편으로 모래섬을 만들었다. 시내 건너편에 쇄강암鎖江巖이 있다 하는데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도로 가에 청대가 이 굽이를 경영한 이후에 지은 채씨 소유 양파정暘坡亭이 있는데 관리를 하지 않아 매우 퇴락한 상태이다.
청대는 벼슬에 나아가 자신의 포부를 펴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세상은 자신의 생각을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권상일은 세상을 떠나서 이곳에 은거하며 은자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청대구곡 제4곡을 자주 찾으며 세상의 인욕을 없애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한가롭게 배를 타고 노를 저어 이 굽이에 이르러 아침저녁으로 배를 매어 놓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청정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제5곡 청대淸臺
五曲中蟠作小臺 오곡이라 중반에 작은 누대 지으니
西巖百尺執崔巍 서쪽 바위 백척이라 높다랗게 솟았네
窩中白髮閒無事 움집 안에 백발노인 한가히 일이 없어
賢聖遺編案上開 성현의 남긴 글을 책상 위에 펼치네
☞ 청대곡淸臺曲
청대구곡 제5곡은 청대淸臺이다. 제4곡 가암佳巖에서 약 400m떨어진 지점이다. 이 굽이는 농청대弄淸臺 앞으로 금천이 흐르는데 이 시내에 구금도보와 존도보가 자리하여 물이 고였다 흐르기 때문에 보의 맑은 물과 농청정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한다. 농청정 오른쪽에는 민가 2채가 자리하고 왼쪽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우사牛舍가 있다. 농청대 왼쪽에는 오동나무거 서 있고 뒤로는 그리 높지 않은 야산이 있는데 3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농청대의 소재지는 문경시 산양면 존도1리 346번지이다. 조선 영조 15년(1739)에 창건하여 처음에는 이름을 ‘존도서와尊道書窩’라 하였는데 순조 8년(1808)에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을 때 ‘존도서와’ 편액만이 남았다. 후인들이 이를 안타까워하여 철종14년(1863)에 중건하였는데 지금의 건물은 이때의 건물을 보수한 것이다.
권상일은 이 지점에 앉아서 앞으로 흘러가는 금천을 내려다 보면서 구도求道하였다.
관어담에서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천리가 유행하는 현상을 보았고 은현암에서 은미하여 드러나지 않는 도를 살폈다. 그리고 존도서와에서 독서를 하며 도에 나아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농弄은 ‘희롱한다’는 의미이고 청淸은 ‘맑다’는 의미이니 곧 농청은 ‘맑음을 희롱한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희롱하다‘의 의미는 ’완상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하고 ’맑다‘는 의미는 ’물이 맑다‘와 ’마음이 맑다‘는 두 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농청은 ’대 앞으로 흐르는 맑은 물을 완상한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의 맑음을 완상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권상일은 청대구곡 제5곡에 작은 대를 지었는데, 곧 존도서와尊道書窩이다. 그는 존도서와에 기거하며 성현이 남긴 글을 읽었다. 권상일이 존도서와에서 한가로운 삶을 살아갈 때는 그의 머리가 이미 백발이 되었으니 만년의 삶을 자연 속에서 성현의 글을 읽으면서 한가롭게 지냈다. 이러한 삶은 주자가 만년에 무이산武夷山에서 살았던 삶과 다르지 않으며 사림士林이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삶이었다. 농청대 가에 자리한 바위는 태고암太古巖이고, 서쪽의 백척이나 높이 솟은 바위는 운현암隱見巖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청대가 이 굽이를 설정할 때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염두에 두고서 설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 제5곡에는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었는데 그 뒤 높이 솟은 바위가 은병암隱屛巖이다. 주자의 무이정사를 모방하여 존도서와를 지었고, 은병암을 모방하여 은현암을 명명하였으니 청대는 주자의 무이구곡 삶을 그대로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제6곡 구잔溝棧
六曲山阿棧路危 육곡이라 산비탈에 잔도가 위태하고
長溝抱石去遲遲 돌을 안은 긴 봇도랑 천천히 흘러가네
西看柳市人爭集 서쪽의 유시에는 사람들 다투어 모이니
緬憶神農交易時 멀리 신농씨가 교역하는 때를 생각하네
☞ 구잔곡溝棧曲
청대구곡 제6곡은 구잔溝棧이다. 이 굽이의 이름은 청대가 명명한 것으로 추정 되는데, 현재의 지명에서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청대에서 물길을 따라 약1km 정도 내려가면 금양교錦陽橋를 만나고 금양교 옆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가다보면 왼쪽에 바위산이 있는데, 이 굽이가 구잔이다. 지금은 산 옆으로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바위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어 훼손된 상태지만 아직도 당시 바위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에는 이 산 옆으로 작은 길이 있고 이 길과 연결된 다리가 있었다 한다. 현재는 큰 다리가 놓여 있고 많은 차량이 다니고 있기 때문에 구잔의 흔적을 찾는 일이 쉽지 않지만 옛날에 금천을 연결하는 다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옛날 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이 산비탈로 이어지고 물을 건너는 작은 다리와 연결되어 있었다.
입암은 금양교 옆에 있는 야산을 의미하니 바위로 이루어진 이 산이 금천에서 바라보면 입암이라 할 수 있다. 그 남쪽으로 녹문鹿門 들이 넓게 펼쳐지는데 이 들판에 옛날 시장이 섰다고 한다. 유림 시장은 바로 녹문들에 섰던 5일 장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 굽이에 있었다는 긴 봇도랑을 찾을 수 없다. 지형이 많이 변하여 찾을 수는 없지만 녹문들에 물을 대기 위하여 낸 봇도랑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구잔은 봇도랑 옆으로 나 있는 잔도로 추정된다.
제7곡 관암觀巖
七曲逶迤二水橫 칠곡이라 구불구불 두 물이 가로 질러
南奔西轉執如爭 남으로 달리고 서로 돌며 다투는 듯하네
中分末合元天理 중간에 나뉘고 끝에 합함이 원래 천리거늘
未到穌湖一道行 소호에 이르지 않아서 한 길로 흘러가네
☞ 관암곡觀巖曲
청대구곡 제7곡은 관암觀巖이다. 제6곡에서 물길을 따라서 약800m 정도 내려가면 황사들판을 흘러서 내려오는 시내와 금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이르는데, 이 굽이 오른쪽에 바위산이 솟아 있다. 해발 115m의 바위산은 시내에 임하여 있어서 금천을 내려가면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권상일은 이 굽이의 이름을 관암이라 하였는데 바위산을 볼 수 있다는 의미로서 관암이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의 금천에는 송죽보가 있는데 이 보 위를 걸어가서 바위산에 접근하면 이 굽이의 전경을 온전히 볼 수 있다.
이 굽이 오른쪽에는 황사들판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신전들판이 자리한다. 금천이 이 지점에 이르러 넓어지면서 천천히 흘러가니 이 굽이에서 잔잔한 물살이 거울처럼 펼쳐진다. 이 거울 위에 바위산이 비쳐 아름다운 경관을 형성한다. 권상일이 이 굽이를 청대구곡의 한 곡으로 설정한 것은 이러한 경관이 한 요소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굽이에서 두 시내가 합류한다. 이건은 자연에서 도를 구하는 성리학자에게 의미가 있는 경관이 아닐 수 없다.
나눠졌던 물줄기가 하나로 합해지는 자연의 현상을 바라보며 ‘이일분수理一分殊’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理는 하나이지만 이것이 만물에 품부될 때 수만 가지로 나뉜다. 그러나 이理로 귀결되면 다시 하나로 된다. 이것은 성리학자들의 세계관이다. 만물은 하나의 이理에서 시작하여 만 가지의 이理를 가진 사물이 되고 이것은 다시 하나의 이理가 된다. 나뉘었던 물줄기가 관암 앞에서 합쳐져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현상을 바라보며 권상일은 천리가 유행하는 단서를 목격할 수 있었다.
제8곡 벌암筏巖
八曲蒼燃峭壁奇 팔곡이라 창연히 가파른 벽 기이하니
周翁風詠在於斯 주옹의 풍영대가 이곳에 존재하네
巖間古蹟篆雙字 바위사이 고적은 두 글자 전서이고
眼底孤山蠶一眉 눈 아래 고산은 누에의 한 눈썹이네
☞ 벌암곡筏巖曲
청대구곡 제8곡은 벌암筏巖이다. 제7곡은 관암觀巖에서 금천을 따라 약 1km정도 내려가면 용두산龍頭山이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는데 이 굽이가 제8곡 벌암이다. 이 굽이를 흐르는 오른쪽에는 기다란 바위산이 병풍처럼 펼쳐 있고 바위산이 끝나는 지점에 자리한 논 가운데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다. 시내 왼쪽에는 작은 들이 자리하고 있고, 들이 끝나는 지점에 용두산이 금천에 임해 있다.
청대는 이 굽이가 훤평촌 서쪽에 있다고 하였다. 훤평은 현재 금남리에 있으니 금남리가 훤평촌이다. 바위 사이에 ‘벌암筏巖’이란 전서篆書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는데 찾지를 못하였다. 벌암이라 명명한 사실로 보아서 바위의 형상이 뗏목의 모양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굽이에서 그러한 바위를 찾을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바위 존재여부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서쪽에 풍영대風詠臺 옛터가 있다고 하였는데 찾지를 못하였다. 다만 시내 오른쪽 산이 끝나는 지점에 위치한 논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부근에 풍영대가 있었지 않았나 추정된다. 남쪽에 잠두소산이 있다고 하였는데 잠두소산은 누에머리 모양의 작은 산을 의미하니 현재 용두산의 맞은편으로 추정된다. 마을 주민들이 잠두소산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산 이름은 청대가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청대는 이 굽이에 이르니 주옹周翁의 풍영대風詠臺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옹은 송나라 학자 주돈이周敦頤이고 풍영대는 그가 자주 찾았던 누대이다. 바위에 새겨진 ‘벌암筏巖’이란 전서 두 글자는 선인들이 땟목을 타고 금천을 내려가며 그 감회를 이기지 못하고 새긴 글자인 것 같다. 청대는 이 굽이에 이르러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청대구곡 극처에 가깝게 온 느낌을 읊었다. 그는 벌암에 올라 잠두소산을 내려다보면서 성리가 구현되는 굽이를 바라보았다.
제9곡 소호穌湖
九曲將終山亦窮 구곡이 장차 다하고 산 또한 다하니
武夷村在岸邊東 무이촌이 언덕 가 동쪽에 자리하네
淵源水接乎郊近 원두의 물은 들판 가까이에 이어지는데
淸遠亭留古壁空 청원정에 남아 있는 고벽은 비었네
☞ 소호곡穌湖曲
청대구곡 제9곡은 소호穌湖이다. 제8곡 벌암筏巖에서 물길을 따라서 약 1.5km정도 내려가면 청원정淸遠亭에 이르는데 이 굽이가 제9곡 소호이다. 이 굽이 왼쪽에는 청원정과 소천서원穌川書院이 자리하고 오른쪽에는 영순면 왕태1리 마을이 있다. 금천은 이 지점을 지나서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굽이에 자리한 마을이 무이리武夷里이니 마을의 이름을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에서 가져왔다. 권상일이 이 굽이를 제9곡으로 설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듯하다. 주자가 무이산에 이르러 은거하였듯이 권상일도 무이리에 이르러 청대구곡 유람을 마쳤다. 이것은 그가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여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청대도 이 굽이에서 주자의 삶을 살고 싶어 하였다.
금천 왼편 언덕에 자리한 청원정과 소천서원은 국파菊坡 전원발全元發( ?~1421)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정자 및 서원이다. 창건 연대는 조선 초기로 전해지고 있으며, 퇴계 이황 시와 김소락 중수기 등이 있다. 정자 뒤편 바위에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1338~1384)이 ‘청원정淸遠亭’ 세 글자를 전서로 음각해 놓았다. 숙종 27년(1701)에 숭덕사와 전교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해 왔던 소천서원은 서원 철폐령에 따라 폐쇄되었다가 1966년 복원됐다.
국파 전원발은 고려 충렬왕 14년(1288) 용궁현 달지리〔현 문경시 영순면〕에서 태어나 1314년 문과에 급제하고 1315년 원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였다. 1354년 금자영록대부, 병부상서겸 집현전태학사로 원나라에서 귀국하였는데 원나라 세공을 감면시킨 공로로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해에 공민왕으로부터 성화천〔소천일대〕을 하사받아 청원정을 짓고 만년을 보냈다. 익제 이제현 등과 교유하였다. 척약재 김구용, 퇴계 이황 이후 청대 권상일이 청원정을 찾았다. 권상일이 찾은 청원정은 청대구곡 제9곡이다. 산이 다하는 지점에 무이촌이 자리하니 이곳이 청대구곡 극처가 아닐 수 없다. 원두에서 흘러오는 물은 들판 가까이 자리한 금천으로 쉼 없이 흐르는데 청원정에 남아 있는 고벽은 텅 비어 있었다. 자연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지만 인간은 짧은 시간 존재하다 떠나가고 그 흔적만 남겼을 따름이다.
☞ 참고 문헌
* 2013 문경 근암서원 인문학 아카데미 강좌
「문경구곡원림의 특징과 활용 방안」교재 91~104쪽 * 장재호님의 “청대 권상일의 청대구곡”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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